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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정치 뉴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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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jfoooo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25-05-27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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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정치 뉴스에 과몰입하는 경향이 심해졌다. 자다가도 일어나 뉴스를 검색할 정도였으니 소위 '내란증후군'의 피해가 적지 않다. 물론 4.4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선고 이후 현재 6.3 대선을 앞두고 있긴 하지만, 경직된 마음이 쉽게 풀리지는 않는다. 특히 -채 진압되지 않은– 이번 내란 사태를 통해 지금껏 내가 믿고 따르고 있던 '민주주의'란 말이 실상은 구체성이 없는 환상이었다는 인식이 크게 들면서, 숨 쉴 틈은 더 좁아졌다.민주주의인가! 법주주의인가!'민주주의의 승리!' 헌재 판결 이후 SNS와 언론 매체를 장식했던 말이다. 나는 문득 위화감이 든다. 지난 겨울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눈 어리석은 폭군을 '법의 명령으로' 그 자리에서 끌어 내리기까지, 수많은 이들이 거리에서, 광장에서, 또 각자 삶의 자리에서 애를 태워야만 했다. 이토록 명백한 국가 폭력과 범죄를 국민 스스로가 직접 판결하지 못하고 법관 9명 -이번 경우엔 가까스로 8명- 의 입만 바라보며 마음 졸여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의아하다 못해 분노가 이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재판관이여, 부디 우리 뜻을 굽어-살펴-주시오!(나는 무의식적으로 종결어미를 '- 주옵소서!'라고 썼다가 기분이 상해 지워버렸다)' 우리의 기도에 법관은 추상같은 말을 내려준다. '오냐, 내 너희를 굽어-살펴-주마.' 21세기, 그것도 소위 민주주의 국가에서 등장하는 장면이라기엔 헛웃음이 날 정도로 가엽기 짝이 없다. 정말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가 맞나? 우리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한다면서도 언제든 마지막에는 '법대'가 기다리고 있는데도? 소수 재판관 몇몇에 우리 삶이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도? 애초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법주주의(法主主義)' 국가를 표명하는 나라였다면 이렇게까지 큰 반발심과 의구심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어원상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민중의 지배', '인민에 의한 통치'를 뜻한다(demos, kratos). 사전적 정의야 익히 알고 있어도,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내 입으로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 어쩐지 낯설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이유, 즉 먼저 위에서도 언급한 '최종 법대 앞에서' 느껴지는 일종의 굴욕감, 그리고 내가 민주주의를 말하기에 그것을 제도로써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 것 같다는 결핍감이 뒤섞인 데서 비롯1503년 이탈리아 우르비노의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da Urbino, 1483~1520)는 피렌체로 갔다. 약관(弱冠) 20세, 당시 피렌체공화국의 실세였던 마키아벨리가 주도해 베키오궁전 회의실 벽화를 다 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1452~1519)와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1564)가 그린다는 소식 때문이었다.'위대한 자(Il Magnifico)' 로렌초 데 메디치가 1492년 사망한 뒤 피렌체는 극도의 혼란기를 맞았다. 그의 장남 피에로는 애초부터 아버지의 뒤를 이을 그릇이 아니었던 터라 샤를8세의 침공과 피렌체 시민들 지지조차 받지 못하고 쫓겨나 유럽을 떠돌다 그해 사망했다.피렌체는 르네상스와 메디치가를 혐오하던 종교개혁가 사보나롤라가 유일 지도자가 돼 그리스도교공화국을 선포하고 광기 어린 신정(神政)을 펼쳤다. 그러나 곧 대립하던 부패한 성직자와 세속교황 알렉산데르6세의 함정에 빠져 화형 당해 피렌체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그 정치 공백기에 마키아벨리가 민심 수습 차원으로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에게 베키오궁전 벽화를 맡긴 것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들은 한 벽에 같이 벽화를 그려야한다는 것을 몰랐다.당시 아버지뻘인 다 빈치는 51세, 아들뻘인 미켈란젤로 28세였다. 이미 다 빈치는 밀라노 산타마리아델레 '최후의 만찬'으로 어마어마한 명성을 누리던 중이었고, 미켈란젤로는 '피에타'와 '다비드'로 폭발적인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던 때였다. 이 대결은 역시 정치가 마키아벨리의 의도대로 온 유럽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라파엘로는 유복한 궁정화가의 아들로 태어나 뛰어난 그림 실력에 준수한 용모, 완벽한 예절과 성실, 겸손까지 갖춰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젊은이였다. 피렌체에서 그는 두 대가들을 만나 그들의 작품을 수없이 모사하고 연구해 다 빈치의 스푸마토기법과 미켈란젤로의 인물 역동성을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나갔다. 르네상스 세 천재는 그렇게 만났다. 다 빈치가 앙기아리전투를, 미켈란젤로가 카시나전투를 그리기로 한 베키오궁전의 벽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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